진짜 영어실력을 가지려면  

Caleb (Survival English, Power Biz 담당)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고 물어온다. 알고 보면 그것은 방법론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발견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영어 향상의 기본 토대가 형성된다. 인생의 성공과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다 정체성 싸움이다.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 

하는 것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영어의 성공이 달려있다고 믿는다. 이제 와서 나의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영어의 성공은 그대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럼 여러분과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 



1. 당신은 원래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원래 영어를 잘하는 자이고 조금만 노력하면 다시 잘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기 바란다. 성서의 바벨탑 사건 전에 원래 인간의 언어는 하나였고 원래 우리는 언어에 문제가 없었던 존재였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어떤 언어든지 해낼 수 있는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영어를 잘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먼저 자신감이 자신을 지배할 때 영어가 한결 쉬워진다. 앞으로 특히 외국인을 만났을 때 소심해지고 자신 없어 하면서 뒤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난 외국인과 의사소통 잘 하는 자이고, 편히 대해야 하고,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자라는 맘을 갖도록 하라. 



2. 당신은 세계적인 한국인이다. 

세계를 품으라. 당신은 World Korean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세계적으로 그 일을 하고자 하라. 내가 아는 어떤 50대의 재단사 아저씨는 뉴욕의 세계적인 양복점 거리에 자신의 shop을 낼 꿈을 갖고 계시다. 세계적인 꿈을 꾸니 영어에 대한 동기가 넘치신다. 자꾸 까먹지만 말이다. 당신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일꾼이 되고자 꿈을 꾸라. 



3. 먼저 영어의 구조를 당신의 것으로 만들라. 

영어의 구조 파악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영어를 배우는 것은 나의 내면 안에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집을 세우는 데는 기초와 집의 뼈대를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많은 한국학생들이 영어공부를 하고 좋은 TOEFL, TOEIC 성적을 받지만 실제 언어 구사력에 있어서는 너무 형편이 없는 것을 본다. 어휘력이나 영어 점수가 높아도 실제 영어 실력이 없는 것은 마치 건물의 구조는 제대로 세우지 않고, 마당에 건축 자재만 어수선하게 쌓아 놓는 것과 같다. 큰집이든 작은 집이든 건물의 기초와 골격을 제대로 해놓았을 때 그 골격에 맞춰 벽돌을 쌓고 또 창을 달고 문을 다는 것이다.  



영어의 구조가 내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실제 내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데 자연스러워지도록 도와주는 문법공부를 해야 한다. 너무 어려운 문법책이나 자세한 문법공부를 할 필요 없다. 영어의 기본 구조를 파악하는데 도와주는 책을 골라 거기 나오는 문법 사항 별로 있는 예문들을 다 외워야한다. 일단 영어 구조가 내 것이 되면 Reading, Listening, Writing, Speaking 다 열리게 된다. 



4. 부단한 Discipline을 해야 

먼저 자신은 원래 영어의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세계적인 한국인이라는 진리 위에 자신을 꾸준히 세우라. 아무리 해도 난 안돼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철저히 무시하라. 당신은 된다. 영어를 정복하고 당신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멋있게 활동할 날이 온다. 먼저 부단히 당신을 좌절시키고 공부의 동기를 빼앗는 생각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3번에서 말했듯이 영어의 구조를 당신의 것이 되도록 그래서 영어가 편해지도록 부단히 노력하라. 본인은 고등학교 때 문법책을 한 권을 통째로 외웠다. 문법책 한 권, 그리고 기본적인 회화 교제 한 권을 달달 외워라. 영어의 기초는 이렇게 완성된다. 그리고 초보과정에서의 

학원 수업은 한국 선생님에게 배워야 한다. 솔직히 말해 최소 일년 걸린다. 다음 단계는 시중에 나와 있는 드라마 비디오 교제를 섭렵하여 전반적이고 다양한 회화 표현을 익혀라. 그 비디오 시리즈 한가지를 통째로 정복하라. 그리고 외국인 회화 수업을 시작하라. 이것이 중급의 완성이다. 이민 가도 문제없다. 다음은 영화, 시트콤, 뉴스 청취에 도전하라. 당신은 고급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은 평생 해야 하는 작업이다. 



5. 국내에서 스스로 먼저 열심히 해야한다 

연수, 유학을 준비하는가? 최소한 먼저 국내에서 Survival English는 하고 가야 한다. 어학연수의 목표는 여기서 다진 기본기를 연습하고 심화시키는 목표로 가야 한다. 외국 가면 물론 상황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디 있든지 간에 영어에 대한 자습능력을 갖는 것이다. 먼저 스스로 Tape으로도 발음 연습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영어 방송 AFN, CNN, Arirang TV를 이용하고, 국내에 있는 외국인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는 등 한국에서도 영어를 적극적으로 잘 향상시키는 능력을 갖추는 자습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코 큰 사람의 수가 좀더 거기는 많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세계화되면서 굳이 영어권 국가로 나가지 않더라도 국내에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외국인과 접촉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이런 적극적 노력을 하고 있을 때  외적인 것(외국생활, 유학, 언어연수)이 추가되면 더 씨너지 효과를 갖게 되고, 그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 언어연수, 유학 갔다온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거기서도 자기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별로 많이 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국내에 있든 외국에서 영어를 공부하든 자기 스스로 열심히 쓰고 외우며 적극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실력이 잘 향상될 수 없다. 식욕이 없으면 뷔페식당에 가서도 별로 먹을 수 없지만, 배가 고프면 수제비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은 외부 환경의 조건과 관계없이 영어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자기 스스로 학습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6. 전문가의 조언을 들을 때 10년 고생을 1년으로 단축할 수 있다. 

탁월한 영어선생님 수업을 들으며 지도를 받는 것은 본인의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제대로 방향을 잡을 때 본인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익훈어학원에 있는 훌륭한 선생님들의 강의를 통해 영어의 성공을 좀더 앞당길 수 있다.

 

 

출처 이익훈어학원 http://www.ik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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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1. 15:00


임창용 선수가 일본에서 한일 통상 200세이브를 달성하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타이거즈 시절 포수 이종범 선배가 포구 해줬던 경기라고 대답한다. 세이브 기록도 아니었던 경기를... 그 만큼 특별한 기억이었으리라.


이종범

팬이 많은 만큼 안티도 많지만 야구 천재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http://foto.sportschosun.com/news/ntype2_o.htm?ut=1&name=/news/sports/200810/20081010/8aj7410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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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yanggoon_79

2007.06.04. 00:15
 
* 나는 득점을 할 필요없다. 나는 끼워 맞추기 퍼즐의 한 조각으로서 
상대 팀을 꺾기 위해 게임에 출장하는 것이다. 

* 나는 NBA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리바운드를 잡아내야 한다고 
내 마음을 단련시켜 왔다.

* 만일 그 볼을 잡아내지 못하면 나는 댈러스로, 그 거리로, 
그 지옥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라고 다짐해 왔다.
( 로드맨은 달라스의 할렘가에서 20살까지 살았다. )

* 나는 항상 느슨해지지 않으려고 싸우고 있다.

* 하고 싶은 일에는 전력을 쏟아라. 그리고 너를 방해하는 녀석은 누구든지 쓰러뜨려라!

* 덩크슛은 예술이지만 보통 슛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2점에 불과하다.

* 모범 얘기는 대개가 위선이다.

* NBA는 덩크슛을 할 줄 아는 로봇을 원하는 것이다.

* 여러분이 나를 좋아할 수도 미워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코트에서는 어쩄든 확실하게 
플레이 하겠다는 것뿐입니다.
( 샌안토니오로 트레이드되고 난 뒤 데뷔전 때.. )

* 그들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또 그 이미지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만들어 냈을리는 없다. 
때문에 그들은 나를 지배할수 없다.

* 90년대 NBA들어온 선수들은 10년전의 선수들에 비해 미숙하다.

* 게임만으로 충분하다 .농구는 위대한 게임이니까!

* 선수들은 화려한 덩크슛을 하고 매년 ESPN의 스포츠 센터에서 
자기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 나는 스무 살때 댈러스 포트워스 공항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샤킬 오닐은 20살 때 이미 수백만 달러를 벌고 있었고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 상을 받아 들었을때 얼마나 멀고 쓰라린 노정이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던가 하는것을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마음속에 되살아났을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 NBA 최우수 수비수상 수상때 )

* 이기는 게 최고다!

* 무명 선수다. 무명 학교 출신의 무명 선수다.
( NBA진출후 기자의 "자네는 누구지?" 라는 질문에.. )

* 나는 나를 농구선수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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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00:22

 

 

사실 그렇게 선호하거나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타입? 이렇게 얘기하니까 이상하다)

 

하지만 솔직하고 순수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연예인으로서 순수하게 비춰질 수 있다는거 (사실 여부를 떠나서) 쉽지 않은거지만 가끔 그는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국민 약골이라던지, 근육 하나 없는 마른 몸매라던지, 약해보이는 외모, 소심한 성격...뭐 이런 이미지...

그러나 진실한...

절대 연극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건 칭찬이다.

 

그리고 친구이자 동료인 서경석이 군대를 간다고 했을 때 흘리던 눈물을 기억한다.

 

또한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나와서 rock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것도 brutal/death 쪽으로 꽤 매니아 라는 것을....

 

그는 나이스 가이 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

출처 http://blog.naver.com/dleoduq3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의 히로인~
 
 
이케와키 치즈루 (Chizuru Ikewaki)
다른 이름池脇千鶴, ikewaki chizuru, chizuru ikewaki
생년월일1981.11.21
출생지일본 혼슈 오사카
직업배우
공식 홈페이지해외
http://chizuru.ikewaki.jp
  
프로필  |  커리어  |  필모그래피  |  바이오그래피  |  명대사  |  네티즌 제보
성별 : 
취미 : 배구, 피아노 연주
직업 : 배우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인상적인 인간관계 : 아라이 히로후미 (연인)
기동전사 제타 건담 3 - 별의 고동은 사랑 (機動戰士Zガンダム III: 星の鼓動は愛)
2006  | 한국  | SF액션  | 99분
기동전사 제타 건담 2 - 연인들 (機動戰士ZガンダムII 戀人たち, Mobile Suit Z Gundam 2: A New Translation - Lovers)
2005  | 일본  | 애니메이션  | 98분
나이스의 숲 - 퍼스트 컨택트 (ナイスの森, Naisu No Mori: The First Contact)
2005  | 일본  | 코미디

조제/쿠미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언젠가 자기가 없어지게 되면 미아가 된 조개 껍데기처럼...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하지만...그것도 괜찮아!nplay20042005.11.18
조제/쿠미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가란다고 진짜 가버릴거면 가버려!!meme19912006.01.02
조제/쿠미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자니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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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강경지 기자]양동근의 이름 앞에서 두 가지 타이틀이 붙는다. 연기자와 가수라는 타이틀이다. 5월 종영한 MBC 드라마 ‘Dr. 깽’에서 양아치 강달고 역으로 열연을 펼쳤던 연기자 양동근이 이번에는 3집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 양동근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연기와 노래는 어떤 존재일까. 7월 28일 밤 서울 삼성동 클럽 뷔셀에서 진행된 3집 음반 쇼케이스를 겸한 기자간담회에 참석, “나에게 연기와 노래는 밥과 김치와 같은 존재”라고 밝혔다.

밥을 먹을 때 언제나 김치를 먹는 것처럼 연기와 노래 역시 그에게는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나인 셈이다. 따라서 가수는 무엇이고 연기는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렵다.

“가수 활동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양동근은 “그냥 음악을 즐길 뿐이고 즐기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반면 배우라는 직업은 “해를 거듭할수록 책임을 더 요하는 것 같아 무겁다”라고 밝혔다.

아역 배우 출신이기도 한 그는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무겁거나 두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감사하고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어렸을 때 몰랐던 세상을 나이가 드니 알게 됐고 포용력도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신경 쓰지 않고 놀 준비가 된 사람들과 즐겁게 놀 것”이라는 각오를 밝힌 그는 30일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 컴백 무대를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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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山美穗 (나카야마 미호)

직 업 : 영화배우, 탤런트, 가수
생 일 : 1970년 3월 1일
출 신 : 일본 도쿄도 고가네이시(東京都 小金井市)
신 체 : 158cm, 48kg, 80-58-85(cm), 혈액형 O형
가 족 : 2003년 6월, 츠지 히토나리(つじ仁成) 결혼
가 족 : 2004년 1월 장남 '쥬토(十斗)' 출생
소 속 : 빅애플(ビックアップル)
수 상 :
1985년 일본레코드대상 신인상
1988년 일본레코드대상 금상
1995년 호우치영화제 최우수주연여우상 <러브레터>
1996년 일본아카데미 우수주연여우상 <도쿄맑음>
 


※데뷔계기
중학교1학년 때 하라주쿠에서 쇼핑 중 스카우트 되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가수를 동경하였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연예계에 입문하였다. 3년간 보컬 레슨을 받고. 1985년 6월 21일 일약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였다. 데뷔 싱글은 "C"이다. 그 후 드라마에 출연하여 인기가 급상승하였다.
 
※활동경력
여배우로서 눈부신 활약을 할 뿐만 아니라.가수로서도 가요 홍백전에 출장하였다. 
1992년 완즈의 우에스기 노보루와 듀엣으로 부른 "세카이주노 다레요리 깃토"가
대히트하였고 1997년 4월 첫베스트 앨범":TREASURY"를 발매하였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자 탤런트이자 가수.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나 <도쿄맑음>를 통해
영화배우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이 순지가 감독한 [러브 레터]의 청순한 여주인공으로서
많은 팬을 확보하였고 아직도 영화팬들에게는 오껭끼데쓰까~란 말로 기억돼고있다.
 
 
 中山美穗 & WANDS - 世界中の誰よりきっと


혼신의 스윙으로 쌓은 금자탑, 김봉연[오마이뉴스 2007-02-09 08:42]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시속 150km의 속도로 폭주하다가도 수없이 정지하며 거친 숨과 눈빛을 섞고 나누며 환호하고 눈물짓고 긴장하는 세 시간. 그것이 야구다. 

본질적으로 야구경기에서 한 편이 다른 편을 '숨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십 개의 안타로 난타당하는 과정에서도 투수는 쉴 새 없이 땀을 훔치고 호흡을 고르며 눈빛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그 정지된 순간의 호흡과 기세와 다짐이야말로 9회말 투아웃이 되어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경기를 결정짓는 핵심이며 본질이다. 

그 중에서도 홈런이 만들어내는 정적이란, 야구가 가진 모든 희열과 절망과 비장미를 함축한다. 그래서 홈런은 야구장의 축포이며, 야구장의 눈물이고, 야구장의 꽃이 된다. 

승패가 갈라서는 결정적인 순간, '딱'하는 예사롭지 않은 타격음은 경기장을 달구던 수만의 목소리를 한 순간 흡수해버린다. 그리고 적막한 공중으로 솟구쳐진 하얀 공이 그 수만의 시선과 기원과 경악을 꼬리처럼 매단 채 담장 너머로 사라지면, 다시 환희의 함성과 아쉬움의 탄식이, 그리고 득의만만한 승자가 치켜든 주먹과 패자가 흘리는 회한의 눈물이 교차한다. 

수만의 목소리, 한 순간에 흡수해버리는 홈런 

 
▲ 김봉연의 타격 모습
ⓒ2007 해태타이거즈 홈페이지
결정적인 순간에 터지는 끝내기 홈런이 아니더라도 홈런은 항상 극적이다. 아직 미심쩍은 리드를 지켜나가던 순간 터지는 쐐기홈런은 '더 이상의 도전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호기로운 일갈을 울려주는 그 경기의 핵심이 되며, 0-10으로 무너지던 약체 팀의 4번 타자가 때려낸 한 개의 솔로홈런 역시 '이대로 쉽게 짓밟히지는 않는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는 가슴 뜨거운 한 방이 된다. 

그렇지만 작정을 한다고 늘 때려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홈런의 매력이 있다. 세상 어느 감독도 홈런을 전제로 작전을 수립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대했던 홈런을 때려내지 못했다고 해서 타자를 탓하는 관객도 없다. 홈런이란 그야말로 '어쩌면 터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그대로 맞아떨어졌을 때 더욱 믿기지 않는 희열을 맛보게 하는 '한 방'이다. 

그래서 홈런은 아홉 명의 수비수 모두 허공만 바라보며 맥을 놓게 만드는 한 방이며, 심지어는 번트에 도루에, 아웃카운트를 희생하고 유니폼에 흙물 들여가며 2루, 3루까지 진격한 동료 선수와 감독마저 허탈하게 만드는, 오로지 타자 한 사람이 방망이 하나로 만들어내는 일인극이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사에서 김봉연이라는 이름이 영원히 잊힐 수 없는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우리나라 프로야구 최초의 홈런왕이었고, 야구팬들의 가슴 속에 홈런의 매력을 강렬하게 새겨놓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만난 부산고를 상대로, 1-4를 5-4로 뒤집는 극적인 9회말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군산상고에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붙였던 1972년을 끝으로 성인무대로 진출한 김봉연은 그야말로 '괴물신인'이었다. 

연세대 1학년이었던 1973년 대학야구사상 첫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경악스런 기록들을 양산해냈고, 같은 해 고려대와의 정기전에서는 투수로 나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 신분으로 출전했던 1977년 대학선수권에서는 도루왕에 오를 정도로 '못하는 것이 없는' 선수였다. 

70년대판 '괴물 신인' 

그 중에서도 홈런에 관해서는 우리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학무대와 실업무대 그리고 다시 국제무대에서 홈런왕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180cm가 채 되지 않는 키에, 역시 80kg이 넘지 않는 체구. 결코 야구선수로서 큰 축에 들지는 못했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홈런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그리고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홈런타자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김우열이라는 이름은 김봉연에 밀려 미처 5년도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뒷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한국 프로야구가 개막한 것은, 김봉연이 만 서른 살을 넘어가던 1982년이었다. 뛰어난 재능 탓에 강요된 몇 차례의 유급 때문에 서너 살 어린 선수들과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는, 다시 홈런타자로서의 기량이 이미 전성기를 지날 무렵에서야 프로무대에서 활약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다. 

그 해, 한국 프로야구는 각기 자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홈런타자들의 한 판 승부처이기도 했다. 70년대 중후반 이후 국내무대 최고수로 인정받던 김봉연은 물론,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격왕까지 올랐던 전설적인 타자 백인천이 돌아왔고, 밑에서는 이만수라는 젊은 거포가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실업무대에서 한 풀 꺾이기는 했지만 70년대 중반 실업무대의 홈런왕 김우열 역시 절치부심 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원년 해태 타이거즈는 그대로 군산상고 졸업생 팀이었다. 경북고와 대구상고가 휩쓸던 70년대 고교야구 무대에서 홀로 호남세를 지탱했던 군산상고 출신 열 두 명에 광주상고 출신 김종모와 제일고 출신 차영화를 보태 고작 열 네 명으로 출발한 초미니 팀이 해태 타이거즈였다. 

아마추어 무대에서 최동원, 김시진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믿는 도끼' 김용남이 무너져내린 마운드는 '부업투수'인 타점왕 김성한이 10승을 올려 팀내 최다승을 기록했을 정도로 빈약했고 야수진 역시 거의 전 포지션 백업멤버가 없는 위태로운 라인업이었다. 그 해 6개 팀 중 4위에 그쳤던 팀 성적 역시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 맏형 김봉연을 중심으로 한 치의 흐뜨러짐 없는 팀워크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시너지는 어느 팀도 만만히 짓밟을 수 없는 근성을 자랑했고, 약체 팀으로서도 공격부문 개인타이틀을 휩쓸다시피 하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태로운 해태 타이거즈의 맏형 

▲ 8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홈으로 쇄도해 세이프 되고 있는 김봉연
ⓒ2007 한국야구위원회
국가대표팀 합숙소를 탈출해 시즌 중반에 합류하고서도 도루왕을 따낸 '대도' 김일권, 투수로서 10승을 올리는 가운데서도 타점왕을 차지한 김성한, 그리고 홈런왕 김봉연. 

이미 저물기 시작한 태양 김우열과, 아직 떠오를 시기를 맞지 못하고 있던 이만수는 김봉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의외로 홈런왕 경쟁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역사적인 결승타를 터뜨렸던 팀 후배 김준환, 그리고 MBC청룡의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이었다. 

특히 홈런 선두를 주고받으며 막판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했던 것은 백인천이었다. 그는 실업무대 6할대의 타격천재 장효조가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82년 한국프로야구의 독보적인 강자였다. 

비록 마흔을 넘어선 나이였지만, 일본프로야구에서 타격왕까지 올랐던 그에게 한국의 투수들은 기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해 그의 타율은 불멸의 0.412였고 장타율 역시 그 누구도 추월하지 못할 0.740이었다. (1999년 이승엽의 장타율이 0.733이었다.) 

김봉연이 백인천과 맞선 무기는 두 가지였다. 안타가 아닌 홈런에 초점을 맞춰 마치 골프를 치듯 아래서 위로 퍼올리는 엎어 스윙(upper swing)이 그 하나였고, 부러진 다리를 동여매고 타석에 나선 근성이 다른 하나였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3천 안타의 전설 장훈의 가르침에 따라, 방망이를 수평으로 휘두르는 스윙이 하나의 철칙으로 굳어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높은 공은 장타로 이어지지만 낮은 공은 짧은 안타 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타자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투수들은 '낮은 스트라이크'를 잡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김봉연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석보다 높은 마운드에 선 투수의 어깨 위에서 내리꽂히는 공을 결대로 때리자면 자연히 아래에서 위로 그리는 궤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스윙은 아래에서 위로, 보기에도 시원한 원을 그려냈고, 그런 스윙은 그의 '한방'을 의식하며 강박적으로 낮은 곳을 파고드는 투수들의 공을 연거푸 퍼 올려 담장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래서 그의 홈런은 항상 높은 포물선을 그렸고, 공을 쫒는 카메라는 항상 하늘을 비추곤 했다. 그러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하얀 공을 따라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숨넘어가는 듯한 캐스터의 함성이 대여섯 번은 반복되고서야 카메라 앵글에 허름한 외야 스탠드가 나타났고, 다시 바닥을 맞고 한참은 튀어 오르는 공을 따라 몰려든 꼬마 녀석들의 아우성 속에 그의 공은 사라져갔다. 그것이 그의 홈런이었다. 

또한 그는 다른 선수들 같았으면 시즌을 접었을 부상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경기에 나서는 투혼의 소유자였다. 83년 전기리그 직후 동승자가 사망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300바늘 넘게 꿰맨 얼굴의 상처를 콧수염으로 가린 채 한 달 만에 경기에 나서 한국시리즈 MVP에 뽑힌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런 그가 경기 중 부러진 발목에 깁스를 한 채 덕아웃에 앉아있던 82년의 어느 날이었다. 백인천의 집요한 추격에 은근히 마음이 급해진 그는 타격차례를 기다리던 후배 김우근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깁스를 풀고 붕대를 잔뜩 당겨 질끈 묶은 다음 타석으로 직접 나섰다. 

팀의 주장이자 학교 선배가 휘두르는 횡포였다. 그리고 웬만한 안타를 쳐서는 1루까지 살아나가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시도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타석에서 그는 홈런을 날렸고, 결국 한쪽 발만 딛다시피 절룩이며 오래도록 그라운드를 돌아 나왔다. 그런 투혼으로 그는 22개의 홈런을 날려 백인천과 김준환을 세 개 차로 누르고 원년 홈런왕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깁스 풀고 날린 홈런 

▲ 83년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된 김봉연
ⓒ2007 한국야구위원회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스윙을 해라." 

이것이 김봉연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어떤 강한 투수 앞에서도 그는 온 힘을 모아 강하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그러다보면 이따금 헬멧이 벗겨져 '탈모왕'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첫 스윙이 그저 허공을 가르더라도, '여차하면 넘어간다'는 사실을 되새긴 투수의 다음 공은 이미 한풀 기세가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장타나 면해보자고 낮게만 깔려온 그 다음 공은 어김없이 김봉연의 어퍼스윙에 걸려 담장 너머로 날아가곤 했다. 

만 서른에 아쉬운 프로 데뷔를 한 김봉연은, 이듬해부터 타격에 눈을 뜬 후배 이만수, 김성한과 함께 80년대 내내 홈런왕 경쟁을 벌이는 투혼을 발휘했다. 83년에도 22개의 홈런을 때려내 해태 타이거즈의 길고 긴 우승신화의 첫 주춧돌을 놓았고, 서른다섯이 되던 86년에는 다시 2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두 번째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기록했던 한 시즌 스무 개 남짓한 홈런은, 이승엽이 때려낸 56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후배 이만수와 치열한 경쟁 끝에 사상 두 번째로 올라섰던 통산 100홈런의 고지 역시 이미 50여 명이 밟고 지나간 완만한 언덕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홈런왕의 계보 맨 앞에서 떠오르는 것은 김봉연이라는 이름이며, 그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장종훈, 이승엽 그리고 이대호와 또 미래의 홈런왕들을 떠올린다. 

세 번의 타석에서 한 번만 안타를 치면 타격왕이 되고, 그 세 번의 안타 중에서 하나만 담장 밖으로 넘기면 홈런왕이 된다. 그러나, 그러자면 그 아홉 번의 모든 타석에서 어김없이 온힘으로 공을 노리고 온힘으로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 

그래서 홈런왕 김봉연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한다. 그는 그저 힘이 좋았던 선수도, 타격기술이 좋았던 선수도 아니었음을. 그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방향을 틀어 자신의 기대를 배신할지 알 수 없는 교묘한 변화구 한 개에도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과 힘을 집중했던 사람임을 새긴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것만은 아닌 나의 하루를 맞아본다. 생각지 못한 삶의 배신에 우스꽝스럽게 무너지더라도 세게 한 번 부딪혀보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김봉연이 상대했던 김일융과 김시진의 변화구보다 훨씬 교묘하고 능청맞은 세상에 백 번 속아 아흔 아홉 번 헛스윙을 하더라도 언젠가 터뜨리고 말 홈런 한 방을 위해서 말이다. 

George Orwell
1903-1950
 Also known as: Eric Arthur Blair, Edward BurtonJohn Freeman, Eric Blair


Nationality:  British; English 
Birth Place:  Motihari, Bengal, India 
Death Place:  London, England



Genre(s):  
· Autobiographies 
· Essays 
· Literary criticism 
· Novels 
· Satires 
· Social novels


Personal Information: 
· Born Eric Arthur Blair, June 25, 1903, in Motihari, Bengal (now Bihar), India 
· British citizen born abroad 
· died of complications from tuberculosis, January 21, 1950, in London, England 
· buried in All Saints churchyard, Sutton Courtenay, Berkshire, England
· son of Richard Walmesley (a colonial civil servant) and Ida Mabel (Limouzin) Blair 
· married Eileen O'Shaughnessy, June 9, 1936 (died, March 29, 1945) 
· married Sonia Brownell (an editorial assistant), October 13, 1949 
· children: (adopted) Richard Horatio.


Education:

Graduated from Eton College, 1921.


 Politics: 
· Self-described "Tory anarchist" during early 1930s 
· "democratic Socialist" beginning in mid-1930s.


Avocational Interests: 
· Fishing
· carpentry
· gardening 
· raising animals


Military/Wartime Service: 
Militia of Workers' Party of Marxist Unity (POUM), 1937 
based in Catalonia, Spain, served on Aragon front during Spanish Civil War; became lieutenant.

 Local Defence Volunteers (became Home Guard), 1940-43 
served in England during World War II; became sergeant.


Memberships: 
-National Union of Journalists, 
-Freedom Defence Committee (vice-chair).


Occupation:

Writer


Career:

-Writer. 
-Police officer for Indian Imperial Police in Burma, 1922-27 
-dishwasher in Paris, France, 1929 
-The Hawthorns (private school), Hayes, Middlesex, England, teacher, 1932-33 
-Frays College (private school), Uxbridge, England, teacher, 1933 
-Booklovers' Corner (used book store), London, England, clerk, 1934-36 
-shopkeeper in Wallington, Herfordshire, England, beginning in 1936 
-British Broadcasting Corp. (BBC), London, began as assistant, became producer of educational radio programs, 1941-43 
-Tribune, London, literary editor, 1943-45, author of "As I Please" column, 1943- 47
-Observer, London, correspondent in France, Germany, and England, 1945.

 

WRITINGS PUBLISHED IN LIFETIME:


NOVELS
· Burmese Days, Harper, 1934. 
· A Clergyman's Daughter, Gollancz, 1935, 
· Keep the Aspidistra Flying, Gollancz, 1936, 
· Coming Up for Air, Gollancz, 1939, 
· Animal Farm (Book-of-the-Month Club selection), Secker & Warburg, 1945, Harcourt, 1946. 
· Nineteen Eighty-Four (Book-of-the-Month Club selection), Harcourt, 1949.


NONFICTION
·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Harper, 1933. 
· The Road to Wigan Pier, Gollancz, 1937, 
· Homage to Catalonia, Secker & Warburg, 1938, 
· Inside the Whale, and Other Essays, Gollancz, 1940. 

· The Lion and the Unicorn: Socialism and the English Genius (essays), Secker & Warburg, 1941.

· James Burnham and the Managerial Revolution, Socialist Book Centre (London), 1946. 

· Dickens, Dali, and Others (essays), Reynal & Hitchcock, 1946 (published in England as Critical Essays, Secker & Warburg, 1946). 
· The English People, Collins, 1947. 
· Shooting an Elephant, and Other Essays (includes A Hanging), Harcourt, 1950.


Contributor, sometimes under name Eric Blair, of numerous articles and reviews to periodicals, including:

 Adelphi
Contemporary Jewish Record
Horizon
Listener
Manchester Evening News
New English Weekly
New Statesman and Nation 
Time and Tide
Partisan Review


OTHER

  • Talking to India: A Selection of English-Language Broadcasts to India, (Editor, and author of introduction) E. M. Forster and others, Allen & Unwin, 1943.
  • British Pamphleteers, (Editor, with Reginald Reynolds, and author of introduction)Volume 1, Wingate, 1948.
  • ·The Betrayal of the Left: An Examination and Refutation of Communist Policy From October 1939 to January 1941, With Suggestions for an Alternative and an Epilogue on Political Morality, (Contributor) Victor Gollancz, John Strachey, and others, Gollancz, 1941.
  • ·Victory, or Vested Interest?, (Contributor)  Routledge,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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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 이은경.김진경] 서울 SK의 무서운 뒷심을 이끌고 있는 방성윤(25·195㎝). 그는 아시안게임 이후 부상을 딛고 복귀한 이후 100㎏의 당당한 체격과 공격력을 앞세워 외국인선수들을 제치고 공격 전부문에 걸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덕분에 한때 꼴찌를 헤매던 SK는 8위까지 뛰어올랐고. 방성윤은 최근 프로농구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실력만큼이나 화제가 되는 게 바로 경기 때마다 휘날리는 방성윤의 긴 머리다. 경기 중에 지저분해지는 긴 머리를 두고 주변 어른들은 “제발 머리 좀 자르라”고 한마디씩 했다.

지난해 여름 대표팀에 선발됐을 때 ‘호랑이’ 최부영 감독 역시 “당장 짧게 자르고 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방성윤의 머리는 여전히 그대로다.

방성윤은 코트 위의 공격적인 모습과 달리 평소 성격은 ‘수비적’이고 ‘보수적’이다. SK의 한 관계자는 “잘은 몰라도 방성윤이 머리를 기르는 이유는 70%가 자르기 귀찮아서이고 30%가 멋이 목적일 것”이라고 설명할 정도다.

방성윤 역시 “짧으면 미용실에도 자주 가야 되고. 그러면 더 신경 쓰일 것 같다”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고.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며 흡족해 하는 모습이다. 방성윤은 연세대 시절 갈색으로 염색한 짧은 머리를 유지했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긴 머리가 더 어울린다”는 본인의 분석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최근 팀 분위기가 살아나면서 신바람이 난 방성윤은 머리에 새 도전을 해 볼 뜻도 밝혔다. 지난 12일 KCC전에서 이긴 후 인터뷰에서 “머리 스타일을 바꿔 볼 생각도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깔끔하게 다듬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레게 머리로 땋아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는 것. 진지한 방성윤의 표정에 주변 사람들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의아해 했지만 SK 관계자들은 “제발 레게 머리만큼은 막아야겠다”고 입을 모았다고.

 

출처:일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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