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2. 22:40


한화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배영수...
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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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9. 23:37


서정환 진짜 어의 없다. 
이종범이 올해 부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젠 1달 기회를 줄테니 해보라니...
기아 부진이 이종범 때문이라도 되는 듯이 얘기하는군.


정말 그냥 이대로 이종범이 은퇴하게 된다면 눈물이 나올 것같다.

물론 언젠가는 은퇴는 해야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떠밀리듯이 은퇴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납득할 수가 없다, 

멀리까지 찾지 않더라도 지난 WBC만 하더라도 이종범이 없었으면 과연 그런 성적이 나왔을지 의문스럽다. 물론 그가 다한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역활은 인정해줘야한다.

그는 양준혁, 이승엽 과는 또다른 방식의 위대한 선수다.

해태 유니폼을 입고 루 상에 나가면 가볍게 도루 하던 모습
최고라는 탄사가 아깝지 않은 유격수 수비


3할 타율

급할땐 포수 마스크 까지 썼던 그다.

며칠전 엘지: 기아 경기에서도 그는 겨우 안타 1개만을 쳤다.

물론 아쉬웠다. 잔루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경기장에 온 타이거즈 팬 누구도 이종범을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에 모두 박수를 보냈다.

 


 

진정으로 야구 천재가 이대로 서정환 감독 손에 등 떠밀려서 은퇴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다.

 

문득 선동열과 이종범 그리고 가수 양수경이 함께한 노래가 듣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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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9. 08:56


어제는 곧 아프리카로 떠나는 친구를 만났다.

함께 점심으로 추어탕 먹고 영화 오션스13을 보았다.

 

그 친구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이승엽 얘기가 나왔다.

둘 다 야구를 좋아하므로.....

 

지난 일요일 경기에서의 이승엽 모습은 실망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팬의 입장으로...그런 하루였다.

 

투아웃 주자 1/2루 오가사와라 걸르고 이승엽과의 대결, 무기력한 삼진 아웃.

 

작년 같으면 초구 공략 홈런도 많고 대개의 홈런이 미리 예측타격을 했다고 하는데, 요즘은 통 그런 모습 찾아보기가 힘든것 같다.

 

계속되는 부진과 요미우리 4번타자 로서의 부담등 이래 저래 힘들만 하다.

 

나의 이런 의견을 끝가지 듣더니

 

뜸금없이 한마디 한다.

 

친구 왈 "아니 이건 분명 K은행의 저주 야~, 박찬호도 K은행 광고 찍고 부진에 빠졌자나. 분명히 뭔가가 있어"

 

매우 그럴싸하게 들렸다.

 

암튼 에티오피아로 일하러 가는 친구녀석이 건강히 생활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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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0. 21:46


이승엽 선수의 유미우리 홈 경기, 즉 도쿄 돔 경기를 TV로 보다보면

 

자주 꽤 정확하게 응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ramones 의 트레이드 마크인 hey ho ! let's go ! 가 들리는 것이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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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31. 16:22


KCC 이상민 선수의 삼성 입단 소식,,,

참 안타깝다.

 

인터뷰 도중 감정을 추스리는 장면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누구도 10년 동안 소속감을 가지고 일하기가 쉽지않다.

더구나 프로선수라면....

 

이상민 선수의 기분은 나같은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거다.

가슴으로 와 닿지는 않지만 머리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야구에서 기아의 이종범을 삼성으로 보낸다면 ......

아 놔~~~ 상상도 하기 싫다..

 

이번 씨즌 이상민 선수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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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이형종 눈물 닦았다
스포츠2.0 | 기사입력 2007-05-30 18:26   기사원문보기
서울고는 1985년 대통령배와 청룡기 우승을 거머쥐었다. 서울고가 마지막으로 우승하던 해에 현대 김동수는 3학년 포수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 뒤 아직 우승 소식이 없다. 오랜 꿈은 올해 이뤄질 뻔했다. 제41회 대통령배대회에서 서울고는 김동수의 22년 후배인 이형종의 역투에 힘입어 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결과는 '이형종의 눈물'로 남은 아쉬운 패배였다. 김동수는 5월 16일 수원구장에서 후배 이형종을 만나 격려했다. 39살 포수는 18살 투수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리고 LG 입단을 확정지은 이형종의 과제는 무엇일까.
결승전에서 눈물 흘린 서울고 투수 이형종(왼쪽)이 22년 고교 선배 현대 포수 김동수를 만났다.(사진 김대영)

김동수(이하 김) 오랜만이다. 몸은 좀 어떠냐.

이형종(이하 이)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제(5월 15일)부터 강동구청 부근에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마사지를 받으면서 근력 보강을 하고 있습니다.

 네 경기는 가끔 봤다. 힘있게 잘 던지더라. 1학년 때 남해 전지훈련에서 처음 봤지. 그땐 어떤 투수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2학년 때 추계리그에선 놀랐다. 경기고전이던가 삼진을 스무 개쯤 잡았지?

 예.

 또래 타자들의 방망이가 전혀 따라가지 못하던데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섰다는 얘기지. 내가 뛰던 때 박동희(작고)가 그랬지. 박동희의 공은 워낙 빨라 타자들이 말 그대로 손도 못 댈 정도였다. 안타 하나 치면 “운이 정말 좋았다”고들 했으니까. 올해 고교선수 가운데서는 형종이가 최고인 것 같다. 오늘 LG와 계약했다고 들었는데 잘 됐다. (임)태훈이가 두산으로 갔고 넌 LG이니 잠실에서 둘이 던지면 볼만하겠다.

■우승과 준우승

 대통령배 결승전을 TV로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경기 내용이 무척 궁금했다. 잠실에서 LG하고 경기하고 하고 있었는데 경기 중간중간에 더그아웃 옆 방으로 가 TV를 봤어. LG 김영수 사장도 계시더군. 6회쯤에 광주일고에 7-6 한 점 차로 앞서있다고 해서 조마조마했지. 한 타석 다시 돌고 다시 보니 9-6이더군. ‘야, 드디어 우승했구나’싶었는데 경기가 끝나고 돌아오니 9-10으로 역전패했다더구나. 정말 아쉬웠다. 8강전과 4강전도 봤는데 그때 너무 많이 던진 것 같았다. 결승전 때는 힘이 떨어졌었지? 릴리스포인트가 왔다갔다하는 게 보였어. TV로는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네가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팀에서 저를 믿고 있었습니다. 저 때문에 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료들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마음 먹은 대로 공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너 때문에 이긴 경기도 많다는 것도 생각해야지. 프로에서도 투수가 경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 이상이야. 그만큼 야구는 투수가 중요해. 너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동료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야. 너만한 투수가 없었다면 팀이 예선을 통과하고 결승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잘한 거야. 우리 팀 투수들도 2,3일 연속으로 30,40개 던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혼자서 그렇게 많이 던지면 지치지 않을 수가 없지. 고등학교 야구는 투수 한두 명이 계속 던져야 하니 힘들어.

 선배도 저처럼 울었던 적이 있습니까.

39살 포수의 손(왼쪽)과 18살 투수의 손.(사진 김대영)

 왜 없었겠니. 중학교 때 많이 울었지. 포지션이 포수인데 중학생이 무슨 힘이 있나. 상대팀에서 1루만 나가면 나를 노리고 계속 도루를 하는데 알면서도 못 잡으니까 눈물이 나더라고. 프로에서는 한 번 운 적이 있어.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LG가 해태에 졌어. 시리즈가 끝난 뒤 준우승 트로피를 받으러 나가야 하는데 눈물이 나서 도저히 나가지 못하겠더라. 이겨서 흘리는 감격의 눈물보다는 진 뒤 뼈 아픈 눈물이 기억에 오래 남아.

 선배는 대통령배에서 2년 연속 최우수선수(MVP)가 되셨고 우승한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학교 다니면서 맛본 우승이 특별하지. 2학년 때(1985년) 대통령배 우승할 때는 마침 수학여행기간이었어. 경주로 내려간 친구들이 라디오를 켜놓고 중계를 들었다고 하더군. 지금도 친구들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해. 우승을 하면 야구 팬이 되는 친구들도 많이 생기는 것 같고. 넌 준우승하고 나니까 어땠어.

 (침묵하다)아쉽습니다.

 ‘차라리 결승전에 오르지 말 걸’하는 생각도 들 거다. 승부의 세계는 그런 것이야.

 선배가 대통령배 우승했을 때가 궁금합니다.

 우리 때는 이용호(전 태평양)와 박형렬(전 OB)이라는 뛰어난 투수 두 명이 있었어. 그때는 투수 등판 제한 규정이 있어 두 명이 번갈아 던졌어. 팀 구성이 좋았지. 2학년 때는 동기에 임형석(전 OB, 롯데), 김경수(전 쌍방울), 3학년 선배들로는 김병효(현 서울고 감독), 김풍기(KBO 심판위원) 등이 있었어. 1984년에 대통령배와 봉황기, 이듬해에 대통령배와 청룡기 우승기를 받았지. 1985년이 마지막 전국대회 우승이니 결국 서울고는 내가 졸업하고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구나. 아마 네가 태어나기도 전일 걸?

 제가 1989년생입니다.

 거 봐라. 내가 왜 경기 중에 TV로 결승전을 봤는지 이해하겠지.

■나의 고교시절

 선배의 고교 시절은 어땠습니까.

 벌써 20년 전 일이군. 아무래도 사춘기이니 놀고 싶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친구들도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10대 소년들이 야구에 전념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야. 자기 재능만 믿고 훈련을 게을리 하는 선수들이 많아. 그런 선수들은 보통 일찍 시들지. 운동을 하다 보면 수업에 잘 들어가지 못해. 나도 그랬고. 하지만 학교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야 한다. 언제 친구들 많이 만나라고 얘기해 준 적이 있었지?

 네. 많이 사귀었어요. 선배는 학교 다니면서 어떻게 친구들과 어울렸습니까.

 우리 때야 이렇다 할 놀이 문화가 없었어. 사실 한두 번씩 술을 마시긴 했다. 한 번은 친구들과 신림동 근처 맥줏집에 간 적이 있었어. 돈이 좀 생겼거든. 사복을 입긴 했는데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고. 주인에게 “저기요, 맥주는 안 마시구요, 통닭만 먹고 갈게요”라고 말했지. 하지만 야구하는 동료들 가운데 담배를 피우는 친구는 없었어.

저희 동기들도 흡연은 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술은 가끔씩. 딱 두 번 술자리에 가봤습니다. 저는 많이 마시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민등록증 보여달란 소리를 안 하더라고요. 노래방에 한 번 갔는데 주인 아저씨가 절 알아봤습니다.

'신인 때부터 기대한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건 미련한 짓이야.'(사진 김대영)

 팬카페도 생겼다며. 여자 친구 있니?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라.

 없어요. 아는 여학생들은 있는데 사귀는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요새는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보내겠지만 우리 땐 팬레터란 게 있었지. 고교 때 처음 여학생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여자친구를 사귀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지. 프로에 와선 인기가 좋았는데 1994년 류지현, 서용빈김재현이 들어오면서 (팬레터)물량이 그쪽으로 쏠리더라고. 그래도 꽤 받았는데 결혼한 뒤론 감감 무소식이다.

■프로란

이제 프로로 올 텐데 제구력이 흔들리는 것 같더라. 2학년 때는 컨트롤이 기가 막혔는데 3학년 때 스피드를 의식하면서 무너진 것 같다.

그렇습니다.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데 어려워요.

 2학년 때는 제구력이 좋았는데 3학년이 되고 스피드가 늘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타자를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은 있겠지만 지나치게 힘으로만 가고 있어. 공을 던질 때 고개가 왼쪽으로 틀어지고 있어. 그러면 스트라이크존이 흔들리게 마련이지. 투수의 어깨는 분필과 같다고 누군가가 그랬다. 많이 쓰다 보면 닳게 돼 있어. 계속 빠르게, 빠르게만 가다 보면 후반에 공 끝이 무뎌질 수밖에 없지.

이 3학년 들어오면서 스피드를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대회에선 타자에게 안타를 맞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어요. 그러니 힘이 자꾸 들어갔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던질 때는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물론 파워 피처가 매력이 있지. 타자 입장에서 가장 치기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게 빠른 공이거든. 나도 포수로 공을 많이 받아봤지만 잘 던지는 투수들의 직구는 미트 느낌부터 다르지. 하지만 컨트롤 위주로 던지는 피칭을 연구해봐. 어떤 타자가 어떤 공에 약한지도 연구를 많이 해야 하고. 이게 되면 타자를 쉽게 상대할 수 있어. 네게 한 경기만 남아있다면 힘으로만 갈 수도 있지. 하지만 결국은 한화 송진우 선배처럼 오래 던지는 투수가 훌륭한 선수야. 짧은 기간 돈을 많이 벌고 그만두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야. 네가 배운 게 야구다. 나이 들어서도 계속 야구를 하는 것만큼 행복이 없어. 요즘은 프로 코치들이 전문 지식이 늘었으니 열심히 하면 될 거다. 프로에 대한 두려움은 혹시 있나.

설레면서도 걱정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신인들이 처음 프로에 들어오면 자기 자리를 알게 된다. 내 자리를 차지해야 밥줄이 끊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돼. 1군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열심히 해야 해. 내가 신인 때만 하더라도 선배들이 그렇게 열심히 훈련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요즘 선수들은 달라. 신인과 프로 2년생의 차이는 매우 크다. 프로에 오면 너보다 공은 느리지만 경기 운영이 앞서는 투수들을 볼 수 있을 거야. 프로에 오면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라. 신인 때부터 기대한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건 미련한 짓이야.

 저도 그렇고 동기들은 대다수가 프로 입단이 1순위입니다. 선배 때는 어땠습니까.

 우리 땐 대학 진학이 우선이었지. 동기 가운데 박형렬만 OB로 갔고. 그 전에는 문희수(전 해태) 선배처럼 고졸 신인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 지금은 대학 진학보다 프로 입단이 더 낫다는 생각이야. 기량을 빨리 익힐 수 있고. 대학에 진학하면 아무래도 병역 부담이 더 커져.

'프로에 대해 설레이고 걱정되는 게 사실입니다.'(사진 김대영)

 선배는 연세가 많습니다. 몸관리가 철저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래 선수 생활을 하는 비결이 있습니까.

 ‘나이’라고 해라. 특별한 비결은 없지. 흡연은 하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 편이야. 나이가 들어 친구들을 만나면 그런 자리가 많아진다. 하지만 친구들한테도 은퇴할 때까지 좀 참아달라고 해. 내 현역 생활은 앞으로 1,2년 정도 남았을 거다. 그동안 내가 세웠던 목표를 꼭 지키려 한다. 훈련은 자기와의 약속이야.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반드시 해야 한다. 이게 굳어져야 해. 컨디션이 좋을 때 운동량을 늘리고, 나쁘면 쉬는 식으로 하다 보면 몸이 ‘최상의 상태’를 기억하지 못해.

쉬는 날은 어떻게 보내십니까.

 보통 직장인들과 비슷하지. 지난 주에도 놀이동산에 다녀왔고. 쉬는 날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이야. 리듬을 깨선 안되니까. 홈경기 때는 오전 8시30분, 원정 때는 9시30분에 일어나. 낮 12시쯤에 일어나는 선수들도 있어. 선수마다 자기 관리법은 다르겠지만 난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이야. 덕분에 딸 유치원 버스도 태워줄 수 있고. 하지만 아들이 초등학교 가는 건 못 본다. 그런데 아침은 잘 챙겨먹나?

 오전7시 조금 넘어 일어나 7시40분에 아침밥을 먹습니다. 잠은 오후 11시쯤에 잡니다.

 프로에서는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해. 내년에는 같은 경기장에서 보겠구나. 태훈이를 처음 수원구장에서 상대했는데 공이 좋더라. 첫 타석에서 직구를 안타로 때려냈는데 다음 타석부턴 줄곧 변화구만 던지더군. 프로는 냉정해. 못 쳤어도 기분은 좋았어. 그런데 넌 날 만나면 어떤 공을 던질 거냐?

 선배가 2루타, 3루타, 홈런을 하나씩 친 상황이라면 안타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사이클링히트 기록 선사해드리죠(웃음). 하지만 다른 상황이라면 무조건 삼진으로 잡겠습니다.

 점수 차가 많이 나면 알아서 잘 던져라(웃음). 몸에 맞히면 안돼. 오랜만에 후배를 만나니 기분이 좋군. 10년 뒤에는 형종이가 내 자리에 있고 형종이 자리에는 다른 후배가 있겠지. 다치지 않고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1990년에 입단해 신인왕을 받은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어느덧 지금 내 위로는 송진우 선배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유혹을 이기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군. 프로 선수에게는 여러 유혹이 많다. 하지만 정한 목표가 있다면 참아내야 한다.

SPORTS2.0 제 52호(발행일 5월 21일) 기사

최민규, 심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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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1. 15:00


임창용 선수가 일본에서 한일 통상 200세이브를 달성하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타이거즈 시절 포수 이종범 선배가 포구 해줬던 경기라고 대답한다. 세이브 기록도 아니었던 경기를... 그 만큼 특별한 기억이었으리라.


이종범

팬이 많은 만큼 안티도 많지만 야구 천재인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http://foto.sportschosun.com/news/ntype2_o.htm?ut=1&name=/news/sports/200810/20081010/8aj7410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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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yanggoon_79

2007.06.04. 00:15
 
* 나는 득점을 할 필요없다. 나는 끼워 맞추기 퍼즐의 한 조각으로서 
상대 팀을 꺾기 위해 게임에 출장하는 것이다. 

* 나는 NBA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든 리바운드를 잡아내야 한다고 
내 마음을 단련시켜 왔다.

* 만일 그 볼을 잡아내지 못하면 나는 댈러스로, 그 거리로, 
그 지옥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라고 다짐해 왔다.
( 로드맨은 달라스의 할렘가에서 20살까지 살았다. )

* 나는 항상 느슨해지지 않으려고 싸우고 있다.

* 하고 싶은 일에는 전력을 쏟아라. 그리고 너를 방해하는 녀석은 누구든지 쓰러뜨려라!

* 덩크슛은 예술이지만 보통 슛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2점에 불과하다.

* 모범 얘기는 대개가 위선이다.

* NBA는 덩크슛을 할 줄 아는 로봇을 원하는 것이다.

* 여러분이 나를 좋아할 수도 미워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코트에서는 어쩄든 확실하게 
플레이 하겠다는 것뿐입니다.
( 샌안토니오로 트레이드되고 난 뒤 데뷔전 때.. )

* 그들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또 그 이미지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만들어 냈을리는 없다. 
때문에 그들은 나를 지배할수 없다.

* 90년대 NBA들어온 선수들은 10년전의 선수들에 비해 미숙하다.

* 게임만으로 충분하다 .농구는 위대한 게임이니까!

* 선수들은 화려한 덩크슛을 하고 매년 ESPN의 스포츠 센터에서 
자기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 나는 스무 살때 댈러스 포트워스 공항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샤킬 오닐은 20살 때 이미 수백만 달러를 벌고 있었고 자서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 상을 받아 들었을때 얼마나 멀고 쓰라린 노정이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던가 하는것을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마음속에 되살아났을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 NBA 최우수 수비수상 수상때 )

* 이기는 게 최고다!

* 무명 선수다. 무명 학교 출신의 무명 선수다.
( NBA진출후 기자의 "자네는 누구지?" 라는 질문에.. )

* 나는 나를 농구선수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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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의 스윙으로 쌓은 금자탑, 김봉연[오마이뉴스 2007-02-09 08:42]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시속 150km의 속도로 폭주하다가도 수없이 정지하며 거친 숨과 눈빛을 섞고 나누며 환호하고 눈물짓고 긴장하는 세 시간. 그것이 야구다. 

본질적으로 야구경기에서 한 편이 다른 편을 '숨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십 개의 안타로 난타당하는 과정에서도 투수는 쉴 새 없이 땀을 훔치고 호흡을 고르며 눈빛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그 정지된 순간의 호흡과 기세와 다짐이야말로 9회말 투아웃이 되어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경기를 결정짓는 핵심이며 본질이다. 

그 중에서도 홈런이 만들어내는 정적이란, 야구가 가진 모든 희열과 절망과 비장미를 함축한다. 그래서 홈런은 야구장의 축포이며, 야구장의 눈물이고, 야구장의 꽃이 된다. 

승패가 갈라서는 결정적인 순간, '딱'하는 예사롭지 않은 타격음은 경기장을 달구던 수만의 목소리를 한 순간 흡수해버린다. 그리고 적막한 공중으로 솟구쳐진 하얀 공이 그 수만의 시선과 기원과 경악을 꼬리처럼 매단 채 담장 너머로 사라지면, 다시 환희의 함성과 아쉬움의 탄식이, 그리고 득의만만한 승자가 치켜든 주먹과 패자가 흘리는 회한의 눈물이 교차한다. 

수만의 목소리, 한 순간에 흡수해버리는 홈런 

 
▲ 김봉연의 타격 모습
ⓒ2007 해태타이거즈 홈페이지
결정적인 순간에 터지는 끝내기 홈런이 아니더라도 홈런은 항상 극적이다. 아직 미심쩍은 리드를 지켜나가던 순간 터지는 쐐기홈런은 '더 이상의 도전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호기로운 일갈을 울려주는 그 경기의 핵심이 되며, 0-10으로 무너지던 약체 팀의 4번 타자가 때려낸 한 개의 솔로홈런 역시 '이대로 쉽게 짓밟히지는 않는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는 가슴 뜨거운 한 방이 된다. 

그렇지만 작정을 한다고 늘 때려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홈런의 매력이 있다. 세상 어느 감독도 홈런을 전제로 작전을 수립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대했던 홈런을 때려내지 못했다고 해서 타자를 탓하는 관객도 없다. 홈런이란 그야말로 '어쩌면 터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그대로 맞아떨어졌을 때 더욱 믿기지 않는 희열을 맛보게 하는 '한 방'이다. 

그래서 홈런은 아홉 명의 수비수 모두 허공만 바라보며 맥을 놓게 만드는 한 방이며, 심지어는 번트에 도루에, 아웃카운트를 희생하고 유니폼에 흙물 들여가며 2루, 3루까지 진격한 동료 선수와 감독마저 허탈하게 만드는, 오로지 타자 한 사람이 방망이 하나로 만들어내는 일인극이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사에서 김봉연이라는 이름이 영원히 잊힐 수 없는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우리나라 프로야구 최초의 홈런왕이었고, 야구팬들의 가슴 속에 홈런의 매력을 강렬하게 새겨놓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만난 부산고를 상대로, 1-4를 5-4로 뒤집는 극적인 9회말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군산상고에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붙였던 1972년을 끝으로 성인무대로 진출한 김봉연은 그야말로 '괴물신인'이었다. 

연세대 1학년이었던 1973년 대학야구사상 첫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경악스런 기록들을 양산해냈고, 같은 해 고려대와의 정기전에서는 투수로 나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 신분으로 출전했던 1977년 대학선수권에서는 도루왕에 오를 정도로 '못하는 것이 없는' 선수였다. 

70년대판 '괴물 신인' 

그 중에서도 홈런에 관해서는 우리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학무대와 실업무대 그리고 다시 국제무대에서 홈런왕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180cm가 채 되지 않는 키에, 역시 80kg이 넘지 않는 체구. 결코 야구선수로서 큰 축에 들지는 못했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홈런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그리고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홈런타자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김우열이라는 이름은 김봉연에 밀려 미처 5년도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뒷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한국 프로야구가 개막한 것은, 김봉연이 만 서른 살을 넘어가던 1982년이었다. 뛰어난 재능 탓에 강요된 몇 차례의 유급 때문에 서너 살 어린 선수들과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는, 다시 홈런타자로서의 기량이 이미 전성기를 지날 무렵에서야 프로무대에서 활약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다. 

그 해, 한국 프로야구는 각기 자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홈런타자들의 한 판 승부처이기도 했다. 70년대 중후반 이후 국내무대 최고수로 인정받던 김봉연은 물론,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격왕까지 올랐던 전설적인 타자 백인천이 돌아왔고, 밑에서는 이만수라는 젊은 거포가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실업무대에서 한 풀 꺾이기는 했지만 70년대 중반 실업무대의 홈런왕 김우열 역시 절치부심 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원년 해태 타이거즈는 그대로 군산상고 졸업생 팀이었다. 경북고와 대구상고가 휩쓸던 70년대 고교야구 무대에서 홀로 호남세를 지탱했던 군산상고 출신 열 두 명에 광주상고 출신 김종모와 제일고 출신 차영화를 보태 고작 열 네 명으로 출발한 초미니 팀이 해태 타이거즈였다. 

아마추어 무대에서 최동원, 김시진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믿는 도끼' 김용남이 무너져내린 마운드는 '부업투수'인 타점왕 김성한이 10승을 올려 팀내 최다승을 기록했을 정도로 빈약했고 야수진 역시 거의 전 포지션 백업멤버가 없는 위태로운 라인업이었다. 그 해 6개 팀 중 4위에 그쳤던 팀 성적 역시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 맏형 김봉연을 중심으로 한 치의 흐뜨러짐 없는 팀워크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시너지는 어느 팀도 만만히 짓밟을 수 없는 근성을 자랑했고, 약체 팀으로서도 공격부문 개인타이틀을 휩쓸다시피 하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태로운 해태 타이거즈의 맏형 

▲ 8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홈으로 쇄도해 세이프 되고 있는 김봉연
ⓒ2007 한국야구위원회
국가대표팀 합숙소를 탈출해 시즌 중반에 합류하고서도 도루왕을 따낸 '대도' 김일권, 투수로서 10승을 올리는 가운데서도 타점왕을 차지한 김성한, 그리고 홈런왕 김봉연. 

이미 저물기 시작한 태양 김우열과, 아직 떠오를 시기를 맞지 못하고 있던 이만수는 김봉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의외로 홈런왕 경쟁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역사적인 결승타를 터뜨렸던 팀 후배 김준환, 그리고 MBC청룡의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이었다. 

특히 홈런 선두를 주고받으며 막판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했던 것은 백인천이었다. 그는 실업무대 6할대의 타격천재 장효조가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82년 한국프로야구의 독보적인 강자였다. 

비록 마흔을 넘어선 나이였지만, 일본프로야구에서 타격왕까지 올랐던 그에게 한국의 투수들은 기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해 그의 타율은 불멸의 0.412였고 장타율 역시 그 누구도 추월하지 못할 0.740이었다. (1999년 이승엽의 장타율이 0.733이었다.) 

김봉연이 백인천과 맞선 무기는 두 가지였다. 안타가 아닌 홈런에 초점을 맞춰 마치 골프를 치듯 아래서 위로 퍼올리는 엎어 스윙(upper swing)이 그 하나였고, 부러진 다리를 동여매고 타석에 나선 근성이 다른 하나였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3천 안타의 전설 장훈의 가르침에 따라, 방망이를 수평으로 휘두르는 스윙이 하나의 철칙으로 굳어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높은 공은 장타로 이어지지만 낮은 공은 짧은 안타 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타자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투수들은 '낮은 스트라이크'를 잡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김봉연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석보다 높은 마운드에 선 투수의 어깨 위에서 내리꽂히는 공을 결대로 때리자면 자연히 아래에서 위로 그리는 궤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스윙은 아래에서 위로, 보기에도 시원한 원을 그려냈고, 그런 스윙은 그의 '한방'을 의식하며 강박적으로 낮은 곳을 파고드는 투수들의 공을 연거푸 퍼 올려 담장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래서 그의 홈런은 항상 높은 포물선을 그렸고, 공을 쫒는 카메라는 항상 하늘을 비추곤 했다. 그러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하얀 공을 따라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숨넘어가는 듯한 캐스터의 함성이 대여섯 번은 반복되고서야 카메라 앵글에 허름한 외야 스탠드가 나타났고, 다시 바닥을 맞고 한참은 튀어 오르는 공을 따라 몰려든 꼬마 녀석들의 아우성 속에 그의 공은 사라져갔다. 그것이 그의 홈런이었다. 

또한 그는 다른 선수들 같았으면 시즌을 접었을 부상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경기에 나서는 투혼의 소유자였다. 83년 전기리그 직후 동승자가 사망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300바늘 넘게 꿰맨 얼굴의 상처를 콧수염으로 가린 채 한 달 만에 경기에 나서 한국시리즈 MVP에 뽑힌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런 그가 경기 중 부러진 발목에 깁스를 한 채 덕아웃에 앉아있던 82년의 어느 날이었다. 백인천의 집요한 추격에 은근히 마음이 급해진 그는 타격차례를 기다리던 후배 김우근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깁스를 풀고 붕대를 잔뜩 당겨 질끈 묶은 다음 타석으로 직접 나섰다. 

팀의 주장이자 학교 선배가 휘두르는 횡포였다. 그리고 웬만한 안타를 쳐서는 1루까지 살아나가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시도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타석에서 그는 홈런을 날렸고, 결국 한쪽 발만 딛다시피 절룩이며 오래도록 그라운드를 돌아 나왔다. 그런 투혼으로 그는 22개의 홈런을 날려 백인천과 김준환을 세 개 차로 누르고 원년 홈런왕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깁스 풀고 날린 홈런 

▲ 83년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된 김봉연
ⓒ2007 한국야구위원회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스윙을 해라." 

이것이 김봉연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어떤 강한 투수 앞에서도 그는 온 힘을 모아 강하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그러다보면 이따금 헬멧이 벗겨져 '탈모왕'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첫 스윙이 그저 허공을 가르더라도, '여차하면 넘어간다'는 사실을 되새긴 투수의 다음 공은 이미 한풀 기세가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장타나 면해보자고 낮게만 깔려온 그 다음 공은 어김없이 김봉연의 어퍼스윙에 걸려 담장 너머로 날아가곤 했다. 

만 서른에 아쉬운 프로 데뷔를 한 김봉연은, 이듬해부터 타격에 눈을 뜬 후배 이만수, 김성한과 함께 80년대 내내 홈런왕 경쟁을 벌이는 투혼을 발휘했다. 83년에도 22개의 홈런을 때려내 해태 타이거즈의 길고 긴 우승신화의 첫 주춧돌을 놓았고, 서른다섯이 되던 86년에는 다시 2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두 번째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기록했던 한 시즌 스무 개 남짓한 홈런은, 이승엽이 때려낸 56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후배 이만수와 치열한 경쟁 끝에 사상 두 번째로 올라섰던 통산 100홈런의 고지 역시 이미 50여 명이 밟고 지나간 완만한 언덕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홈런왕의 계보 맨 앞에서 떠오르는 것은 김봉연이라는 이름이며, 그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장종훈, 이승엽 그리고 이대호와 또 미래의 홈런왕들을 떠올린다. 

세 번의 타석에서 한 번만 안타를 치면 타격왕이 되고, 그 세 번의 안타 중에서 하나만 담장 밖으로 넘기면 홈런왕이 된다. 그러나, 그러자면 그 아홉 번의 모든 타석에서 어김없이 온힘으로 공을 노리고 온힘으로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 

그래서 홈런왕 김봉연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한다. 그는 그저 힘이 좋았던 선수도, 타격기술이 좋았던 선수도 아니었음을. 그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방향을 틀어 자신의 기대를 배신할지 알 수 없는 교묘한 변화구 한 개에도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과 힘을 집중했던 사람임을 새긴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것만은 아닌 나의 하루를 맞아본다. 생각지 못한 삶의 배신에 우스꽝스럽게 무너지더라도 세게 한 번 부딪혀보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김봉연이 상대했던 김일융과 김시진의 변화구보다 훨씬 교묘하고 능청맞은 세상에 백 번 속아 아흔 아홉 번 헛스윙을 하더라도 언젠가 터뜨리고 말 홈런 한 방을 위해서 말이다. 

[JES 이은경.김진경] 서울 SK의 무서운 뒷심을 이끌고 있는 방성윤(25·195㎝). 그는 아시안게임 이후 부상을 딛고 복귀한 이후 100㎏의 당당한 체격과 공격력을 앞세워 외국인선수들을 제치고 공격 전부문에 걸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덕분에 한때 꼴찌를 헤매던 SK는 8위까지 뛰어올랐고. 방성윤은 최근 프로농구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실력만큼이나 화제가 되는 게 바로 경기 때마다 휘날리는 방성윤의 긴 머리다. 경기 중에 지저분해지는 긴 머리를 두고 주변 어른들은 “제발 머리 좀 자르라”고 한마디씩 했다.

지난해 여름 대표팀에 선발됐을 때 ‘호랑이’ 최부영 감독 역시 “당장 짧게 자르고 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방성윤의 머리는 여전히 그대로다.

방성윤은 코트 위의 공격적인 모습과 달리 평소 성격은 ‘수비적’이고 ‘보수적’이다. SK의 한 관계자는 “잘은 몰라도 방성윤이 머리를 기르는 이유는 70%가 자르기 귀찮아서이고 30%가 멋이 목적일 것”이라고 설명할 정도다.

방성윤 역시 “짧으면 미용실에도 자주 가야 되고. 그러면 더 신경 쓰일 것 같다”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고.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며 흡족해 하는 모습이다. 방성윤은 연세대 시절 갈색으로 염색한 짧은 머리를 유지했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긴 머리가 더 어울린다”는 본인의 분석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최근 팀 분위기가 살아나면서 신바람이 난 방성윤은 머리에 새 도전을 해 볼 뜻도 밝혔다. 지난 12일 KCC전에서 이긴 후 인터뷰에서 “머리 스타일을 바꿔 볼 생각도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깔끔하게 다듬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레게 머리로 땋아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는 것. 진지한 방성윤의 표정에 주변 사람들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의아해 했지만 SK 관계자들은 “제발 레게 머리만큼은 막아야겠다”고 입을 모았다고.

 

출처:일간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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