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원문 http://krdic.naver.com/detail.nhn?kind=korean&docid=38156200
취생몽사 醉生夢死

발음 : 취ː---

[명사]
술에 취하여 자는 동안에 꾸는 꿈 속에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한평생을 아무 하는 일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취사(醉死).
취생몽사하다 [취ː-----]
[동사]
⇒취생몽사. 
그는 주색에 빠져 취생몽사하며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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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쉬르레알리슴이라고도 한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1917년 시인 아폴리네르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에 쉬르나튀랄리슴[超自然主義]이라는 명칭을 생각했으나, 철학용어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여 초현실주의로 고쳤다고 한다.

초현실주의가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이 《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간한 1924년부터이며, 1925년에는 이 운동의 첫 종합전이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이성(理性)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 ·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는 사실주의나 추상예술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달리의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밀한 묘사력은 사실(寫實)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으며, 또 A.마송, J.미로, M.에른스트의 작풍(作風)에도 추상화의 경향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기술적으로는 사실성·추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초현실주의 뿌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다이즘에서 찾아야 한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기성의 전통·질서에 대한 파괴운동이었던 만큼 비합리를 예찬하고 때로는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흐르며, 콜라주와 같은 새로운 기법, 오브제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도 채택했으며, 초현실주의 강력한 무기인 에로티시즘에 이르러서는 다다이즘의 비도덕적인 자세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기원을 더 먼 곳에 찾아본다면, 그것은 당연히 입체주의(입체파)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20세기의 예술운동 속에서 야수파나 표현주의 이상으로, 입체주의는 혁신적인 공간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야수파나 표현주의가 원색주의를 택하고 강렬한 감정표현을 주체로 삼았다고 한다면, 입체주의는 종래의 회화를 부정하는 순수한 이념화(理念化)만을 꾀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한 개의 화면을 완벽한 평면으로 보는 관점이며, 일찍이 세잔이 추구한 원근법이라든지 전경 ·후경의 배치와는 별도의 구성, 별도의 공간개념을 필요로 하였다. 초현실주의 공간은 많은 경우, 상상적 공간이며 비현실의 공간이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간접적으로 입체주의의 계열을 잇는 공간파악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그 때까지 빙산처럼 수중에 가리어 있었던 무의식의 영역에 눈을 돌렸다. 즉, 이성(理性)의 반대의 극점, 합리의 반대쪽의 세계이다. 초현실주의가 나타나기 이전에, 예술은 이성과 감성, 정신과 마음이 합치는 지점에 그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미 예술은 그러한 조화 ·통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자아는 밝음과 어두움의 두 부분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자아의 확대라는 문제에 제일 먼저 눈뜬 것은 낭만주의였다. 여기에 미술사가들이 지적하듯, 낭만주의에서 직접 초현실주의로 맥을 잇는 정신의 계보가 있다. 한 예로서 독일 낭만파의 노발리스, L.티크, W.H.바켄로더의 사상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술환상》의 저자인 바켄로더는 끝없이 감미로운 도취상태에 그의 예술의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티크는 격렬한 자아의 분열상태 속에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티크의 대표작인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여행》 속에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사상의, 이 끝없는 동요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 나의 마음을 살짝 만지며 스쳐 지나가는 그 부드러움이 내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려준다면, 나는 행복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게 되고 예술가도 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억압할 수가 없다. 불가항력이라고나 말해야 할지. 나의 계획 ·희망 ·신념 모두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감정에 빠져버리고 만다.” 

또한 《푸른 꽃》의 저자인 노발리스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꿈의 세계 속에서 방황을 계속했던 사람이다.
독일 낭만파 문학에서 영향받은 독일 낭만파의 회화는 O.룽게나 C.D.프리드리히의 회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무한대의 동경을 그 특질로 삼고 있다. 또 그들의 작품에는 종교적 감정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초현실주의는 종교감정 대신에 프로이트의 리비도설(說)이 도입된다. 따라서 인간의 숨겨진 부분에 상상력을 펼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술적으로 보아 프랑스 낭만주의의 거장인 V.위고는 그의 데생에서 이미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오토마티슴)에 가까운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여류작가 G.상드가 풍경화 속에다 이끼나 꽃 같은 것을 붙인 것도 일종의 콜라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무형체를 지향하였다. 창조력이란 그것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현존하는 것을 뛰어넘어, 비구상(非具象)의 경향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낭만주의는 자아를 절대시하고, 그것에 무제한의 능력을 부여했을 때에 비로소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가능한 한 참되게 표현하려고 하는 초현실주의의 갖가지 시도는 시 ·회화 ·사진 ·영화 속에서 현실적인 연상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것, 비합리적인 것, 우연한 것 등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은 당시의 모순된 현실과 결부되어 예술일반의 인식을 비약시키고 20세기 특유의 환상예술을 발흥(勃興)시키게 된다. 

특히 미술의 경우 초현실주는 종래의 공간의식과는 별도의 비현실세계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새로운 테크닉을 필요로 하였다. 도밍게스의 데칼코마니, 에른스트의 프로타주, M.레이의 레요니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와 같은 테크닉이 충격의 효과를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자인 R.마그리트에 이르면 큰 바위덩어리를 공중에 띄워놓는다든지, 낮이 밤으로 변해 있는 등 정신의 전위(데페이즈망)를 볼 수 있다. 이렇게 기법에 있어서의 데페이즈망과 정신에 있어 그것이 초현실주의의 최대의 표현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미술가로서는 그 밖에 Y.탕기, M.뒤샹, A.자코메티, 레오노르 휘니, J.B.파렝, 투아이앙 등을 꼽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운동은 20세기 프랑스 문학에 하나의 변혁을 가져왔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다다이즘의 파괴적인 태도에 만족할 수 없었던 브르통, L.아라공, P.엘뤼아르, F.수포, A.페레, R.데스노스, 크르베르 등이 《쉬르레알리슴 혁명》지(誌)(1924∼1929)를 통해 문학 운동을 펼쳤다. 영감(靈感)의 발생을 천명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꿈이 지니고 있는 여러 힘의 찬양, 자동기술(自動記述)에 대한 깊은 신뢰, 초현실적 사실의 열렬한 탐구와 평행하여 사회생활이 개인에게 강제하는 모든 것의 금지를 문제삼고 혁명을 통한 자유의 도래를 그려보며 영원히 온갖 제약을 파기하고, 종교적·정치적 신화를 타도하고 사회의 명령에서부터 해방된 개인의 승리를 보장하려 했다. 

또한 문학 ·예술에 한정하지 않고, 윤리 ·종교 ·정치의 면에 있어서도 기성관념에 대한 수정을 가하는 하나의 주의로서 형성되었다. 1924년 브르통의 《쉬르레알리슴 선언》의 발표와 기관지 창간 이후의 수년간, 이 운동의 불길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문학작품으로서는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문체론》, 엘뤼아르의 《고뇌의 수도》, 브르통의 《나자》 등이 이 운동의 실험에 있어서 빛나는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어 새로운 기관지 《혁명에 봉사하는 쉬르레알리슴》이 창간되고, 초현실주의와 초합리주의가 일체를 이루는 브르통과 엘뤼아르의 공동작 《무원죄수태》, 브르통의 대표시집 《자유로운 결합》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일파의 혁명적 야심은 점차 인간의 미적 ·윤리적 개념의 전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정치면에서의 직접 행동으로 옮아갔으나, 초현실주의의 이론과 공산주의 이론의 일치에 실패하여, 이 운동은 분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 우크라이나의 하르코프에서 열린 국제혁명작가회의에 참석한 아라공은 소련에서 정치시(政治詩) 《적색전선》을 발표한 바 있는데, 후일 이 시가 프랑스에 전해지자 이른바, ‘아라공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공산당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택한 아라공은 다음해 이 그룹에서 제명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자, J.위녜의 《쉬르레알리슴 소시선(小詩選)》, 브르통의 《새벽》, 엘뤼아르의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시집 《민중의 장미》, 화가인 S.달리의 《비합리의 정복》이라는 편집광적 비판의 방법에 관한 논문이 쏟아져나옴으로써, 문학·회화 양면에 걸쳐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할 수 있다. 

이 무렵부터 초현실주의는 국제선전운동으로 나타나, 36년에는 런던에서, 1938년에는 파리에서 브르통, 엘뤼아르가 중심이 되어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이 열렸다. 그 사이 브르통의 《미친사랑》, 엘뤼아르 시집, 로트레아몽의 《전집(全集)》이 출판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브르통은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이래로 공산당에 접근하기 시작한 엘뤼아르와 드디어 결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이 초현실주의 운동의 재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평과 신화의 인식과의 방향으로 쏠렸다. 대전중에 브르통, 베레, 달리 등은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에서 초현실주의의 선전을 계속하였다. 

1947년 귀국한 브르통이 파리에서 ‘국제쉬르레알리슴전(展)’을 열고 공산당과 실존주의자들에 대한 집단선언서 《즉시결렬》을 발표하였다. 이 방향에서 나타난 전후의 대표적 작품은 브르통의 시집 《샤를 푸리에에게 주는 오드》가 있다. 유파로서의 초현실주의는 일단 이론적인 면에서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으며, 미학적인 면에서의 영향은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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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6월 13일 의회에서 파시스트를 옹호하는 연설을 하던 호세 칼보 소텔로 의원이 암살되자 의회의 민족 전선 의원들이 사직을 했다. 그것은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프랑코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코는 자기 식으로 철저하게 규율이 잡힌 외인 부대와 레굴라레스(모로코의 정예부대)를 투입할 작정이었다. 

공화국을 구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보다도 '인민'을 무장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군대만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민족 전선 진영에 합류할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공화파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무장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민족 전선측은 지방 관리들이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누어 준 도시들에서만 패배했다. 바르셀로나의 주요 광장과 공공 건물들이 고데드 장군이 이끄는 부대에게 점령당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도시를 다시 탈환하고 고데드를 사로잡았다. 국방성안에서는 사람들이 반란군을 분쇄할 방법은 오직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길뿐이라고 아사냐를 설득하고 있었고, 아사냐는 무기를 나누어 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반란군은 빠른 속도로 스페인 전국토의 1/3 을 장악해 버렸다 

산후료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고, 고데드는 바르셀로나에서 체포되었다. 이제 반란군의 세력판도에서 프랑코의 유일한 경쟁자는 몰라 장군뿐이었다. 
1936년 7월 30일, 프랑코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병력을 공수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내란이 맨 처음 시작될 때부터 '도움이 없다'는 것이 양측을 결정짓는 요인이었다. 
공화주의자들 쪽은 무기와 장비가 너무도 부족한데다가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거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의 기업가들은 민족 전선 쪽을 지원했고, 미국의 회사들은 그들에게 석유와 트럭을 팔았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지도자이며 수상이었던 레옹 블룸은 유럽의 주요 강대국을 설득하여 불간섭 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대체로 서유럽 국가는 이를 따랐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군사와 장비를 보내 주고 있었다. 

한편 '파시스트화'에 위협을 느낀 소련은 불간섭 조약의 서명에 참석했으면서도 공화파쪽에 무기와 장비를 보내주는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11월 8일 히틀러의 비행기들이 폭격을 시작하는 동안, 호세 바렐라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공격을 감행했다. 그 때, 제복과 철모를 착용한 3천 명의 병사들이 마드리드 대로위를 행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파시즘의 물결을 막는 것을 돕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서 지원해 온 국제 여단의 제1진이었던 것이다. 인민 전선의 승리가 있고 나서 약 두달 후에 미국의 의용병 제1진이 스페인에 도착했다. 마드리드 폭격은 연일 계속되고 있었지만 전쟁은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되었다.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공군 폭격기 편대가 바스크의 옛 수도 게르니카라는 소도시를 폭격한다. 그날 오후의 희생자들은 마침 마을광장에서 시장을 벌일 시간에 맞추어 나온 사람들로 1천 6백명 이상이 죽었고, 9백명이 부상했다. 이는 일반폭탄과 소이탄의 치사율을 시험하기 위한 독일의 '실험'이었다. 
1937년 5월 초에, 바르셀로나의 정치적 분쟁은 내란속에서의 또 하나의 내란이 되어 있었다. POUM 이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결합한 조직에 반기를 들고 아나키스트들의 조직인 CNT를 지지한 것이다. 반란군에 대항해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 죽이게 된 것이다. 
1937년 6월, 민족 전선이 바스크 지방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빌바오에서 승리하자 바티칸이 스페인에서의 파시스트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1938년 초에 프랑코는 단 한 번의 대공세를 취하여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했다.1939년까지 3년 이라는 긴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마드리드는 3월 26일의 대공세로 함락되고, 1939년 4월 1일 프랑코 장군은 부르고스에서 전투종결을 선언한다. 1975년까지 매년 4월 1일은 전승기념식이 마드리드에서 열리곤 했다. 1936년에서 1944년까지 대량 처형된 목숨이 또 40만명이었다. 다른나라로 피신한 사람들의 숫자도 그와 비슷했다. 공화파에 가담한 수만 명의 고참병들은 총살당하거나, 20년에서 30년형을 선고받았다. 공화국 시대의 모든 개혁은 백지화되었다. 

출처 : 스페인 이야기(www.espania.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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