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시속 150km의 속도로 폭주하다가도 수없이 정지하며 거친 숨과 눈빛을 섞고 나누며 환호하고 눈물짓고 긴장하는 세 시간. 그것이 야구다.
본질적으로 야구경기에서 한 편이 다른 편을 '숨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십 개의 안타로 난타당하는 과정에서도 투수는 쉴 새 없이 땀을 훔치고 호흡을 고르며 눈빛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그 정지된 순간의 호흡과 기세와 다짐이야말로 9회말 투아웃이 되어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경기를 결정짓는 핵심이며 본질이다.
그 중에서도 홈런이 만들어내는 정적이란, 야구가 가진 모든 희열과 절망과 비장미를 함축한다. 그래서 홈런은 야구장의 축포이며, 야구장의 눈물이고, 야구장의 꽃이 된다.
승패가 갈라서는 결정적인 순간, '딱'하는 예사롭지 않은 타격음은 경기장을 달구던 수만의 목소리를 한 순간 흡수해버린다. 그리고 적막한 공중으로 솟구쳐진 하얀 공이 그 수만의 시선과 기원과 경악을 꼬리처럼 매단 채 담장 너머로 사라지면, 다시 환희의 함성과 아쉬움의 탄식이, 그리고 득의만만한 승자가 치켜든 주먹과 패자가 흘리는 회한의 눈물이 교차한다.
수만의 목소리, 한 순간에 흡수해버리는 홈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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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봉연의 타격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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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해태타이거즈 홈페이지 |
결정적인 순간에 터지는 끝내기 홈런이 아니더라도 홈런은 항상 극적이다. 아직 미심쩍은 리드를 지켜나가던 순간 터지는 쐐기홈런은 '더 이상의 도전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호기로운 일갈을 울려주는 그 경기의 핵심이 되며, 0-10으로 무너지던 약체 팀의 4번 타자가 때려낸 한 개의 솔로홈런 역시 '이대로 쉽게 짓밟히지는 않는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는 가슴 뜨거운 한 방이 된다.
그렇지만 작정을 한다고 늘 때려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홈런의 매력이 있다. 세상 어느 감독도 홈런을 전제로 작전을 수립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대했던 홈런을 때려내지 못했다고 해서 타자를 탓하는 관객도 없다. 홈런이란 그야말로 '어쩌면 터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그대로 맞아떨어졌을 때 더욱 믿기지 않는 희열을 맛보게 하는 '한 방'이다.
그래서 홈런은 아홉 명의 수비수 모두 허공만 바라보며 맥을 놓게 만드는 한 방이며, 심지어는 번트에 도루에, 아웃카운트를 희생하고 유니폼에 흙물 들여가며 2루, 3루까지 진격한 동료 선수와 감독마저 허탈하게 만드는, 오로지 타자 한 사람이 방망이 하나로 만들어내는 일인극이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사에서 김봉연이라는 이름이 영원히 잊힐 수 없는 이유 또한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우리나라 프로야구 최초의 홈런왕이었고, 야구팬들의 가슴 속에 홈런의 매력을 강렬하게 새겨놓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만난 부산고를 상대로, 1-4를 5-4로 뒤집는 극적인 9회말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군산상고에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붙였던 1972년을 끝으로 성인무대로 진출한 김봉연은 그야말로 '괴물신인'이었다.
연세대 1학년이었던 1973년 대학야구사상 첫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경악스런 기록들을 양산해냈고, 같은 해 고려대와의 정기전에서는 투수로 나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 신분으로 출전했던 1977년 대학선수권에서는 도루왕에 오를 정도로 '못하는 것이 없는' 선수였다.
70년대판 '괴물 신인' 그 중에서도 홈런에 관해서는 우리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학무대와 실업무대 그리고 다시 국제무대에서 홈런왕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180cm가 채 되지 않는 키에, 역시 80kg이 넘지 않는 체구. 결코 야구선수로서 큰 축에 들지는 못했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홈런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그리고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홈런타자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김우열이라는 이름은 김봉연에 밀려 미처 5년도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뒷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한국 프로야구가 개막한 것은, 김봉연이 만 서른 살을 넘어가던 1982년이었다. 뛰어난 재능 탓에 강요된 몇 차례의 유급 때문에 서너 살 어린 선수들과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는, 다시 홈런타자로서의 기량이 이미 전성기를 지날 무렵에서야 프로무대에서 활약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었다.
그 해, 한국 프로야구는 각기 자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홈런타자들의 한 판 승부처이기도 했다. 70년대 중후반 이후 국내무대 최고수로 인정받던 김봉연은 물론, 일본 프로야구에서 타격왕까지 올랐던 전설적인 타자 백인천이 돌아왔고, 밑에서는 이만수라는 젊은 거포가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실업무대에서 한 풀 꺾이기는 했지만 70년대 중반 실업무대의 홈런왕
김우열 역시 절치부심 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원년 해태 타이거즈는 그대로 군산상고 졸업생 팀이었다. 경북고와 대구상고가 휩쓸던 70년대 고교야구 무대에서 홀로 호남세를 지탱했던 군산상고 출신 열 두 명에 광주상고 출신
김종모와 제일고 출신 차영화를 보태 고작 열 네 명으로 출발한 초미니 팀이 해태 타이거즈였다.
아마추어 무대에서
최동원, 김시진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믿는 도끼' 김용남이 무너져내린 마운드는 '부업투수'인 타점왕 김성한이 10승을 올려 팀내 최다승을 기록했을 정도로 빈약했고 야수진 역시 거의 전 포지션 백업멤버가 없는 위태로운 라인업이었다. 그 해 6개 팀 중 4위에 그쳤던 팀 성적 역시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 맏형 김봉연을 중심으로 한 치의 흐뜨러짐 없는 팀워크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시너지는 어느 팀도 만만히 짓밟을 수 없는 근성을 자랑했고, 약체 팀으로서도 공격부문 개인타이틀을 휩쓸다시피 하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태로운 해태 타이거즈의 맏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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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홈으로 쇄도해 세이프 되고 있는 김봉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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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국야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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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 합숙소를 탈출해 시즌 중반에 합류하고서도 도루왕을 따낸 '대도' 김일권, 투수로서 10승을 올리는 가운데서도 타점왕을 차지한 김성한, 그리고 홈런왕 김봉연.
이미 저물기 시작한 태양 김우열과, 아직 떠오를 시기를 맞지 못하고 있던
이만수는 김봉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의외로 홈런왕 경쟁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역사적인 결승타를 터뜨렸던 팀 후배 김준환, 그리고 MBC청룡의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이었다.
특히 홈런 선두를 주고받으며 막판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했던 것은 백인천이었다. 그는 실업무대 6할대의 타격천재 장효조가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묶여있던 82년 한국프로야구의 독보적인 강자였다.
비록 마흔을 넘어선 나이였지만, 일본프로야구에서 타격왕까지 올랐던 그에게 한국의 투수들은 기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해 그의 타율은 불멸의 0.412였고 장타율 역시 그 누구도 추월하지 못할 0.740이었다. (1999년 이승엽의 장타율이 0.733이었다.)
김봉연이 백인천과 맞선 무기는 두 가지였다. 안타가 아닌 홈런에 초점을 맞춰 마치 골프를 치듯 아래서 위로 퍼올리는 엎어 스윙(upper swing)이 그 하나였고, 부러진 다리를 동여매고 타석에 나선 근성이 다른 하나였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3천 안타의 전설 장훈의 가르침에 따라, 방망이를 수평으로 휘두르는 스윙이 하나의 철칙으로 굳어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높은 공은 장타로 이어지지만 낮은 공은 짧은 안타 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타자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투수들은 '낮은 스트라이크'를 잡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김봉연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석보다 높은 마운드에 선 투수의 어깨 위에서 내리꽂히는 공을 결대로 때리자면 자연히 아래에서 위로 그리는 궤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스윙은 아래에서 위로, 보기에도 시원한 원을 그려냈고, 그런 스윙은 그의 '한방'을 의식하며 강박적으로 낮은 곳을 파고드는 투수들의 공을 연거푸 퍼 올려 담장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래서 그의 홈런은 항상 높은 포물선을 그렸고, 공을 쫒는 카메라는 항상 하늘을 비추곤 했다. 그러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하얀 공을 따라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숨넘어가는 듯한 캐스터의 함성이 대여섯 번은 반복되고서야 카메라 앵글에 허름한 외야 스탠드가 나타났고, 다시 바닥을 맞고 한참은 튀어 오르는 공을 따라 몰려든 꼬마 녀석들의 아우성 속에 그의 공은 사라져갔다. 그것이 그의 홈런이었다.
또한 그는 다른 선수들 같았으면 시즌을 접었을 부상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경기에 나서는 투혼의 소유자였다. 83년 전기리그 직후 동승자가 사망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300바늘 넘게 꿰맨 얼굴의 상처를 콧수염으로 가린 채 한 달 만에 경기에 나서 한국시리즈 MVP에 뽑힌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런 그가 경기 중 부러진 발목에 깁스를 한 채 덕아웃에 앉아있던 82년의 어느 날이었다. 백인천의 집요한 추격에 은근히 마음이 급해진 그는 타격차례를 기다리던 후배 김우근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깁스를 풀고 붕대를 잔뜩 당겨 질끈 묶은 다음 타석으로 직접 나섰다.
팀의 주장이자 학교 선배가 휘두르는 횡포였다. 그리고 웬만한 안타를 쳐서는 1루까지 살아나가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시도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타석에서 그는 홈런을 날렸고, 결국 한쪽 발만 딛다시피 절룩이며 오래도록 그라운드를 돌아 나왔다. 그런 투혼으로 그는 22개의 홈런을 날려 백인천과 김준환을 세 개 차로 누르고 원년 홈런왕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깁스 풀고 날린 홈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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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년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된 김봉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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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국야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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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스윙을 해라."
이것이 김봉연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어떤 강한 투수 앞에서도 그는 온 힘을 모아 강하게 방망이를 휘둘렀고, 그러다보면 이따금 헬멧이 벗겨져 '탈모왕'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첫 스윙이 그저 허공을 가르더라도, '여차하면 넘어간다'는 사실을 되새긴 투수의 다음 공은 이미 한풀 기세가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장타나 면해보자고 낮게만 깔려온 그 다음 공은 어김없이 김봉연의 어퍼스윙에 걸려 담장 너머로 날아가곤 했다.
만 서른에 아쉬운 프로 데뷔를 한 김봉연은, 이듬해부터 타격에 눈을 뜬 후배 이만수, 김성한과 함께 80년대 내내 홈런왕 경쟁을 벌이는 투혼을 발휘했다. 83년에도 22개의 홈런을 때려내 해태 타이거즈의 길고 긴 우승신화의 첫 주춧돌을 놓았고, 서른다섯이 되던 86년에는 다시 2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두 번째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기록했던 한 시즌 스무 개 남짓한 홈런은, 이승엽이 때려낸 56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후배 이만수와 치열한 경쟁 끝에 사상 두 번째로 올라섰던 통산 100홈런의 고지 역시 이미 50여 명이 밟고 지나간 완만한 언덕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홈런왕의 계보 맨 앞에서 떠오르는 것은 김봉연이라는 이름이며, 그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장종훈, 이승엽 그리고 이대호와 또 미래의 홈런왕들을 떠올린다.
세 번의 타석에서 한 번만 안타를 치면 타격왕이 되고, 그 세 번의 안타 중에서 하나만 담장 밖으로 넘기면 홈런왕이 된다. 그러나, 그러자면 그 아홉 번의 모든 타석에서 어김없이 온힘으로 공을 노리고 온힘으로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
그래서 홈런왕 김봉연을 떠올리며 다시 생각한다. 그는 그저 힘이 좋았던 선수도, 타격기술이 좋았던 선수도 아니었음을. 그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방향을 틀어 자신의 기대를 배신할지 알 수 없는 교묘한 변화구 한 개에도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과 힘을 집중했던 사람임을 새긴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것만은 아닌 나의 하루를 맞아본다. 생각지 못한 삶의 배신에 우스꽝스럽게 무너지더라도 세게 한 번 부딪혀보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김봉연이 상대했던 김일융과 김시진의 변화구보다 훨씬 교묘하고 능청맞은 세상에 백 번 속아 아흔 아홉 번 헛스윙을 하더라도 언젠가 터뜨리고 말 홈런 한 방을 위해서 말이다.